글을 다 썼다. 그런데 또 고쳐야 한다고?

66

마침표를 찍고 나서 “끝났다!”라는 후련함보다 “이제 시작이네…”라는 부담감을 느낀다면 글쓰기의 본질(?)에 다가간 사람이지 않을까. 쓰는 일보다 ‘고치는 일’이 대개 훨씬 더 괴롭다. 글은 고치면 고칠수록 좋아지니까 잘 고쳐야 한다는 말은 여기저기에서 주워들었는데 정작 어떻게 고쳐야 할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초고를 작성한 뒤 모니터를 뚫을 기세로 내 글을 읽고, 읽고, 또 읽어도 아리송하다.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숲에서 시작해서 나무 무늬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자신의 작업 방식에 대해 소설을 쓸 때 플롯을 사전에 짜두지 않고 초고는 생각이 나는 대로 물 흐르듯 쓰는 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초고가 완성되면 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데, 이때는 사건의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없는지, 즉 전체적인 이야기의 줄기를 다듬는 작업에 집중한다. 문장을 세세하게 다듬는 작업은 첫 번째 퇴고를 마친 후, 이야기의 구조가 완성되면 시작한다고 한다.

나는 이 방법에 내 멋대로 ‘숲에서 시작해서 나무 무늬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헬기를 타고 숲에 접근하는 취재원이 된 것처럼 원거리부터 점점 더 가까이, 거리를 좁혀가며 내 글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흔히 글을 고친다고 하면 ‘문장을 고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문장을 다듬는 일에 앞서 글의 구조를 점검하는 일이 먼저다. 소설이 아닌 에세이라고 해도 비슷하다. 뜻밖에 문단의 순서를 바꾸면 해답이 보일 수 있다.

문단과 문단 사이의 순서를 바꾸거나, 불필요한 문단은 과감하게 삭제하는 식으로 헬기를 타고 하늘에서 숲의 전경을 촬영하듯 원거리에서 내 글의 구조적인 단점을 보완하는 일에 먼저 집중하자. 처음부터 한 문장 한 문장을 유려하게 다듬는 일에만 진을 빼면 꼭 봐야 할 부분은 보지 못한 채 읽는 사람에게는 큰 차이가 없는 부분에만 매달리고 있을 수도 있으니. 대부분 문장 하나하나를 아름답게 벼려내 언어의 아름다움, 문학적 정수를 담아내겠다는 야심으로 글쓰기를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나무의 결을 탐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먼저 내가 쓴 글이 어디에 있는 어떤 모양의 숲인지부터 살펴보는 게 어떨까.

 

삭제가 아닌, ‘다음’을 수집하는 과정

글을 다듬을 때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덜어내기’이다. 불필요한 문장을 삭제해야 하는데, 쓰는 일보다 버리는 일이 더 어려워서 끙끙대곤 한다.

“작품을 다시 돌아볼 때는, 지금 이 순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잘라 버릴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전사, 즉 사무라이가 되어야 한다. 미련 없이 적을 잘라 내는 사무라이처럼 자신이 쓴 글을 다시 읽을 때는 기꺼이 감상을 버려야 한다.” – 나탈리 골드버그,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중에서

내 글이 완벽하다는 나르시시즘에 빠진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공을 들여 쓴 문장을 단칼에 삭제하는 일은 어렵다. 군더더기를 덜어내야 명료한 글이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키보드의 백스페이스 버튼 위에 손을 올려두고 주저하게 된다. 초고를 완성할 때까지 들인 시간이, 한 문장 한 문장을 작성하느라 들인 노력이 모조리 다 물거품이 되어 버리다니. 아깝다. 이 아까움 때문에 망설이다 문장을 다시 보고, 다시 보다 보니 또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아리송한 상황이 반복되면 객관성을 잃을 수도 있다. 첫 느낌을 믿고 덜어낼 부분은 과감하게 덜어낼 필요가 있다.

애써 쓴 글을 스스로 난도질하는 마음이 유독 껄끄럽다면 덜어내야 할 것 같은 문장을 그대로 긁어 잘라내기를 한 다음에 흰 페이지를 열어 그대로 옮겨두자. 파일명은 ‘다음에 쓰자’. 이 방법은 홍승은 작가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라는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작가는 글을 고치려 하면 관성 때문에 문장이나 단어 하나를 수정하기도 쉽지 않을 때마다 “이 문장(문단)은 다른 글에 양보해……”라는 말을 기억하며 문장을 드래그해서 다른 폴더에 저장해 놓는다. ‘비록 지금은 못 쓰지만 다른 글에는 꼭 쓰겠다는 심정으로’ 문장을 옮기면 마음이 편안하다는 작가의 고백을 읽은 이후로 퇴고할 때마다 나도 빈 파일 하나를 열어두기 시작했다. 파일명은 ‘다음에 쓰자.’ 빈 파일에 문장을 하나씩 옮기다 보면 어느새 초고에서 확연히 달라진 글을 확인할 수 있었다. 휴지통에 버리는 것도 아니고, 다음에 쓸 재료를 모아두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마음도 가볍다.

 

내가 쓴 글이 낯설어 보일 때까지 기다리기

퇴고를 할 때는 초고를 작성한 후 시차를 두는 게 좋다. 거리를 두고 내 글을 점검하려면 내가 쓴 글이지만 낯설어 보일 때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빵을 구울 때 반죽을 한 뒤 발효 시간을 기다리는 것처럼 초고의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었다면 잠시 다른 일을 하면서 기다리자.

사람마다 필요한 기간은 다르다. 짧으면 바깥 산책이나 샤워 한 번으로도 발효 시간이 끝날 수도 있고, 일이 끝난 후에도 벗어나는 시간이 유독 오래 걸리는 사람이라면 최소 일주일은 걸릴 수도 있다. 사람의 성향뿐 아니라 쓰는 글의 장르에 따라서도 발효 기간이 다르다. 나는 이야기와 캐릭터에 몰입해서 쓸 수밖에 없는 소설을 쓰는 기간에는 초고를 쓴 뒤 내 글을 객관적으로 다시 읽기까지 2주 이상의 기간이 필요했지만 에세이는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만 기다려도 객관화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오히려 에세이는 글을 쓸 때의 생각과 감정이 완전히 날아갈까 봐 발효 시간을 너무 길게 잡지는 않는 편이다. 하루 이틀 정도 다른 일을 하며 내버려 둔 뒤, 바로 퇴고를 시작한다.

기다리는 일은 별것 아니니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생각보다 마음이 괴로운 일이다. 혼자 보려고 쓰는 글이 아니라 누군가가 요청한 글, 모월 모시에 올려야만 하는 글이라면 더 그렇다. 부채감 때문이다. 일이 끝날 때까지 빚에 쫓기는 신세가 된 것 같아 빨리 갚아버리고 싶다. 빨리 빚을 갚으려는 마음이 앞서면 무리한 투자를 하다가 큰 낭패를 보는 사람처럼 결과적으로는 나중에 내가 쓴 글을 보면서 후회하게 될 수도 있다. 물론 마감을 어기지 않는 건 두 번 강조할 필요도 없이 중요한 덕목이지만 ‘제출’만이 목표가 되면 곤란하다. 빨리 마음이 편해지고 싶어서 글에서 보이는 빈 부분들을 애써 보이지 않는 척 무시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마음이 급해질 때면 ‘천천히’라는 단어를 곱씹자. 글을 쓰는 이유는 업로드가 아니라,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