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국부(國父)의 굴욕적인 엔딩

“왕실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떠나기로 결심했다.” 스페인 전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82)가 쫓기듯이 고국을 떠나기 전에 남긴 말이에요. 지난 6월 스위스 언론은 카를로스 1세가 사우디 왕실로부터 1억 달러(약 1200억 원) 상당의 뇌물을 받은 의혹이 있다고 보도했어요. 스페인 대법원이 이를 수사하라고 했고요. 카를로스 1세는 망명을 자처합니다. 다만 검찰이 조사한다면 응하겠다고도 밝혔어요. 현재는 그가 도미니카로 건너갔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스페인에 입헌군주제를 정착시켜 ‘민주주의의 수호자’로도 불렸던 카를로스 1세, 그의 말년이 좋지 않네요.

✔️ 키워드: 스페인, 후안 카를로스 1세, 뇌물수수 혐의

사우디가 뒷주머니에 꽂아준 1억 달러

지난 2009년 이슬람 성지인 메카-메디나를 연결하는 고속철 사업이 사우디에서 착공됐어요. 이 사업을 스페인 컨소시엄*이 따냈는데요. 사우디 정부가 공사 대금 2억 1,000만 유로를 제때 지급하지 않았지만 당시 국왕이던 카를로스 1세가 배후에서 중재한 것으로 밝혀졌어요. 이에 대한 대가로 사우디의 압둘라 전 국왕은 그에게 1억 달러를 선물했는데요, 뇌물인 거죠. 카를로스 1세가 이 돈을 내연관계인 독일인 사업가 코리나 라르센을 통해 스위스의 비밀계좌에 넣어두고 세탁했다는 겁니다.

* 컨소시엄: 공동 목적을 위해 조직된 협회나 조합

국왕은 면책특권이 있다

스페인 법에는 “국왕은 재임 중 행위에 대해서는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면책특권이 있어, 2014년 카를로스 1세가 퇴임하기 이전의 행위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을 수 없어요. 결국 범죄 사실이 드러나도 스페인 검찰은 그를 기소하지 못하는 거죠. 그럼에도 그가 망명을 결심한 건, 국민의 시야에서 사라져 현 왕실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보여요.

한때는 ‘가장 존경스러운 스페인인’

후안 카를로스 1세는 파시스트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죽은 이듬해인 1975년, 왕위에 올라 2014년까지 약 40여 년간 스페인의 국왕을 재위했어요. 그는 권력을 내각에 완전히 넘겨주고 입헌군주제를 정착시키며 민주화를 선도했습니다. 일명 ‘프랑코 체제’로 불렸던 권위주의 독재정권에 지쳐 있던 스페인 국민들에게 카를로스 1세는 구원자였죠. 2007년에는 ‘가장 존경스러운 스페인인’ 설문조사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할 정도로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는 왕이었어요.

지금은 우당탕탕 트러블 메이커

존경받던 카를로스는 재위 말년부터 슬슬 물의를 일으키기 시작했어요. 2012년 카를로스는 보츠와나에서 라르센과 코끼리 사냥을 즐기다 골절상을 당했는데요. 이때 혼외 관계가 드러났어요. 당시 극심한 경제난 속에서 국왕이 호화스러운 여흥을 즐긴 점 그리고 그가 동물 보호 단체인 ‘월드 와일드라이프 펀드’의 명예 회장임에도 코끼리 사냥을 한 점 등으로 국민들은 크게 실망했어요. 그동안 쌓아왔던 좋은 이미지가 한순간에 날아가 버린 겁니다. 이후에도 딸과 사위마저 부패 사건에 연루되면서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2014년 왕위를 아들인 펠리페 6세에게 물려주고 퇴위했어요.

스페인 왕실, 존폐 위기?

카를로스 1세가 스위스 은행에 몰래 묻어둔 재산을 찾을 권리가 아들인 펠리페 6세 국왕에게 있다는 사실이 올해 초 드러났어요. 이에 펠리페는 지난 3월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지 않겠다고 발표했고, 전직 국왕인 카를로스에게 주는 국가 연금 20만 달러도 취소했어요. 하지만 이미 카를로스의 잇따른 추문으로 국민들 사이에서는 왕실 폐지 여론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스페인 언론은 연일 왕실 비판 기사로 도배하고 있고요. 현지 방송국이 스페인의 각 기관에 대한 여론 평판 조사를 한 결과, 왕실과 펠리페 6세 현 국왕이 각각 10점 만점에 4.3점, 4.8점으로 최하위 평점을 받았습니다.

집 떠나 어디로 가나

4일(현지시간) 스페인 일간지 ABC는 카를로스가 지난 2일 포르투갈을 거쳐 카리브해 지역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건너갔다고 전했습니다. 일각에서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포르투갈로 가거나,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머물 수도 있다고 추정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스페인 왕실 대변인은 그가 어디 있는지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지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