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 한국어도 할 줄 아는데…

고도로 집중된 전문성이 요구된다

미국에는 그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전공 분야와 목적을 지닌 싱크탱크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하지만 본래 싱크탱크의 업무는 모호한 지위와 성격의 바탕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기관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한 안전장치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중 하나가 공공성과 독립성을 저버리고 특정 개인, 정파, 또는 기업을 위해 연구비가 악용되었을 경우 법적으로 누리는 세제 혜택을 박탈하는 것이다. 세제 혜택을 못 받으면 기부자는 당연히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타 기관을 후원하게 된다.

따라서 법은 싱크탱크 생태계를 둘러싼 수요자와 공급자 모두가 공공성과 독립성을 잃지 않도록 제동을 거는 감시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미국의 싱크탱크가 활발하게 운영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공직 채용의 유연성에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미국은 고시 같은 시험을 거치지 않고도 공직 채용이 다른 나라에 비해 쉬운 편이다. 인사시스템 또한 직위 분류에 근거하고 있어서 공무원들이 장기적으로 순환보직제에서 축적할 수 없는 경험과 전문성을 보장받게 된다.

퇴직 후에도 공직에서의 경험을 살려 싱크탱크나 비영리재단에서 보다 자유로운 정책 연구에 나서는 커리어 제2막이 가능한 이유다.

게다가 미국은 대체로 정부가 발주하는 연구용역마저도 전문성 없이 정치판을 떠도는 한국의 폴리페서(정치 낭인)들이 부업으로 건드릴 수 없는 매우 세분화된 프로젝트를 의뢰하는 경우가 많다.

고도로 집중된 전문성과 경험을 갖추고 자기 분야에 충실한 전문가 집단이 아니라면 좀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업무가 맡겨지는데, 그렇기 때문에 유능한 전문가 집단을 보유한 싱크탱크의 공신력은 한층 더 강화될 수밖에 없다.

물론 필자가 근무 중인 싱크탱크처럼 정부의 후원을 일절 받지 않는 기관과 정부의 지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체제 중 어느 것이 절대적으로 우월한지는 단정해 말하기 어렵다. 핵심은 싱크탱크가 자유로운 사고방식과 문제해결을 위한 장으로 기능하기 위해 그에 걸맞은 생태계를 임직원들에게 제공할 수 있냐는 것이다.

물론 세상 그 어느 시스템도 완벽할 수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니까. 모든 연구소는 편향성을 이유로 비난을 받는다. 그 또한 이 업계의 숙명이다. 한국도 우리가 누구에게 후원받는지를 떠나서 항상 개방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기꺼이 대화하며 문제 해결에 힘쓰는 싱크탱크 생태계가 하루빨리 자리매김했으면 한다.

 

사교 모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전 칼럼에서 싱크탱크의 인사 검증을 간단하게 짚고 넘어간 바 있다. 실력뿐만 아니라 순발력과 위트, 언어능력, 그리고 뛰어난 사회성과 프로페셔널한 매너 등이 모두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필자가 미국에서 경험한 싱크탱크 문화 중 가장 신선했던 것이 바로 낯선 이들과의 네트워킹이었다. 한국 기업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접대나 회식과 비교하자면 지나치게 느슨해 보일 수 있는 갈라 디너(gala dinner)의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다.

이렇듯 싱크탱크의 임직원들은 일면식도 없는 이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그들의 집이나 사무실 또는 연회장에서 열리는 다양한 행사를 수시로 드나들며 술과 음식을 매개체로 한 네트워킹 업무를 수행한다. 싱크탱크의 업무는 미식과 사교 생활이 현대인의 교양과 철학을 넘어서 얼마나  주요하게 기능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한편 우리 싱크탱크는 이런 네트워킹을 통해 고객과 후원자를 끌어모으는 한편, 파티를 빙자한 트랙 1.5나 트랙 2 형태의 다자외교 채널을 통해 실질적인 정책 문제 해결을 도모하고, 사교모임 그 자체를 제도적 돌파구로 사용하기도 한다.

미국 국방성의 블랙리스트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미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대화를 꺼려하는 ‘이적단체’와 불가피한 협상을 대신 맡아서 한다거나, 지금처럼 미국과 중국의 행정부가 무역전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시기에 앞장서 군사적 충돌 방지를 위한 이면 채널(back channel) 개통에 힘쓰는 것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적응 능력은 개개인에게 요구된다

필자가 기획에 참여하고 있는 미·일 군사 대화나 미·중 의회 대화의 경우, 대개 패널참가자는 10명 내외로 제한되며, 행사 관련 세부사항은 극비에 부쳐진다. 물론 모든 싱크탱크가 이렇게 비밀리에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싱크탱크는 공개적인 활동을 통해 아이디어를 생산하고, 지식을 보급하며, 새로운 구상을 실현할 방법을 투명하고 치열하게 논의한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고, 세계적으로 통용되던 정치, 경제, 외교, 군사적 패러다임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변화 속도에 대한 적응 능력이다. 그리고 적응 능력의 중요성은 싱크탱크라는 조직에게 요구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스태프 개개인에게 요구되는 역량이다.

뉴욕 소재의 한 외교 안보 싱크탱크의 오퍼를 수락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출근을 위해 오피스에 도착했다. 40층짜리 건물의 한 층을 통째로 사용하고 있었다. 고작 서른 명 남짓 되는 스태프가 사용한다기에는 믿기 힘들 정도로 넓고 좋은 전망이 제일 먼저 시선을 사로잡았다.

첫 번째로 나에게 말을 건 사람은 내가 근무할 아태지역팀의 신입 협조관(Program Coordinator)이었다. “반가워요. 오신다는 얘기 들었어요. 그쪽 이력을 보니까 일본어, 영어에 능통하고 안보를 전공했다고요?”  ‘한국어도 할 줄 아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천천히 보여주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내게 다짜고짜 서류 뭉치부터 건네며 이런 프로젝트도 해본 적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이전 싱크탱크에서 연구 인턴을 했을 적에 비슷한 프로젝트를 맡아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외교·안보를 전공으로 하고 있고, 비슷한 업무를 맡아봤기에 익숙한 내용이 많았다.

첫 출근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신입치고는 꽤 능숙하게 자료 검토(due diligence)에 임했으며,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양호한 수준의 리서치를 첫날부터 내놓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며칠 뒤 윗선에서도 좋은 피드백이 있었고, 그날 이후 눈에 띄게 업무 스케일과 재량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규모가 작은 조직이라 당장 업무에 투입 가능한 인재를 적극 활용하는 데 임원들은 망설임이 없었다. 물론 해당 분야를 전공하고 괜찮은 학벌을 가졌다고 해서 모든 스태프가 투입 첫날부터 실무를 맡는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가 맞아떨어진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싱크탱크는 연봉이나 직급과는 무관하게 주어진 프로젝트를 보다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듯했다.

 

한국 관련 프로젝트가 너무 없다

보통 싱크탱크에 처음 입사한 스태프에게는 오리엔테이션이 있다. 각 부서에서 맞춤형으로 제작한 매뉴얼을 중심으로 한 직무교육을 받고 공문서 작성 훈련과 본인이 맡은 지역이나 분야에 대한 정세분석 기술이나 그에 필요한 소양 교육을 받기도 한다.

공식행사가 없는 날에 세미 정장과도 같은 다소 포멀한 복장을 요구하는 곳도 있고, 필자가 근무 중인 싱크탱크처럼 행사가 없는 날에는 캐주얼로 출근이 가능한 곳도 있다. 큰 행사 스케줄을 앞두고는 보통 해당 국가에 맞는 의전 교육을 받는다.

기본적인 차량 탑승이나 출입문 앞에서 응대 등 여러 시나리오를 전제로 방문하는 외국 대표단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교육받는다. 전직 대사나 고위직 관료의 특별강연이 있는 날이면 스태프는 정장을 갖추고 강연 시간 15분 전에 미리 전원 착석해 대기하는 것도 이러한 의전과 예의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의전을 따지는 조직이지만, 행사가 없는 시기의 싱크탱크는 개개인에게 최대한의 자율성을 부여하는 업무 환경을 가지고 있다. 행사가 많아서 고급 식당이나 호텔 갈라 디너를 참석하는 경우가 잦고, 관계부처 고위 관료들과 정책 문제를 함께 논의할 기회가 주어진다.

대부분의 직원이 최소 석사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있고, 근무시간이 상당히 유연하기 때문에 본인의 프로젝트만 기한에 맞춰서 끝낸다면 당장 내가 일을 하는지 딴짓을 하는지 내게 관심을 갖는 이는 없다.

이곳에서 근무하며 한 가지 특이했던 것이 모두 내게 일본 관련 업무 위주로 맡길 뿐, 한국과 관련된 프로젝트가 생각보다 너무 없다는 점이었다. 입사 첫날 한국어는 빼놓고 ‘일본어’가 유창한 지 내게 물었던 것을 포함해, 이런 배경에는 전부 이유가 있다.

 

 

쇼니 송
칼럼니스트 | 미국, 동북아 정세에 관심이 많으며 미국의 싱크탱크 EastWest Institute에서 일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