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아프리카에 갔냐고?

누구나 한 번쯤은 나와 대화하고 싶다

평범한 삶에서 누구나 한 번쯤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싶을 것이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누구보다도 평온한 길을 걷던 내게 혼자만의 내적 갈등은 늘 있었다. 과연 내 인생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우리 부모님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것일까?

학교 내신성적과 명문대학, 취업이 인생의 정해진 길일까? 마음속 꿈틀거리던 고민들을 껴안은 채,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 내적 갈등은 더 깊어졌다. 진정 어른이 되는 길은 동아리 활동과 성적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앎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은 제한되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붉게 타오르던 신비로운 땅, 인도에 마음이 이끌렸다. 그리고 스물한 살, 2006년 12월 용기를 내어 인도 땅을 밟았다. 가난과 더러움이 있는 곳, 아직 많은 이들에게 부정적인 시선이 가득했던 나라였지만 내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가장 잘할 수 있는 ‘사진’을 매개로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했다.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와 문화, 종교가 다른 사람들 속에서 공존하는 법을 사진을 통해 배웠다. 내가 정한 기준과 선입견 없이 사람을 대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터득해 나갔다.

 

2006년 인도,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해가 질 무렵, 때 낀 버스창문을 바라보며 문뜩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이 정한 틀에 나를 가져다 끼우는 삶을 당연하게 받아드렸다면 지금의 나는 없을 거라고. 내적인 결핍을 해소하려 찾아온 인도에서의 2달이 나를 바꿨다고. 뻔한 말이지만 돈이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그 곳에서 피부로 느꼈다. 나라는 사람이 세상의 다양함과 다원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음에 괜시리 뿌듯하기도 했다.

 

때 낀 버스 창문 밖으로 인도가 보인다

 

두 번째 인도

다시 한국 돌아와서도 여행에서 배운 나만의 철학과 가치관을 유지하고 싶었다. 최대한 남들과 다른 길을 찾으려 했다. 그리고 대학 4학년 졸업 직전인 2009년 12월, 내 마음을 움직였던 인도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두 번째 여행에서는 첫 번째 여행에서 깨달은 진정한 ‘나’라는 사람을 좀 더 뚜렷하게 알아가기로 했다. 

 

2009년 두 번째 인도 여행 중 갠지스강 강가

 

평소 등산을 좋아했던 터라 인도에서 히말라야 등반은 늘 동경의 대상이었다. 두 번째로 간 인도에서 꼭 히말라야를 등반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가이드나 짐꾼 없이 홀로 산을 오르는 것은 무리수였다. 여행사를 통해 한국인 관광객들과 그룹 투어를 하자니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그러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일본인 친구를 만났는데, 나와 같은 고민을 갖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마음이 맞아 관광지가 아닌 마을의 주민들이 찾는 산을 오르기로 했다.

 

2009년 히말라야 중턱에서 만난 마을 주민들과 함께

 

지도 한 장만을 손에 쥔 채 버스를 타고 마을 끝 종점에 내려 개울을 지나 산을 올랐다. 다듬어진 곳이 아니었다. 정해진 등산로가 없어 때로는 길을 잃기도 했다. 따로 쉴 수 있는 숙소나 게스트하우스도 없었다. 해가 지기 전, 가까운 마을을 찾아 휴식을 취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우리는 마을 주민이 사는 집의 문을 무작정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마치 우연을 가장한 인연처럼 우리가 찾은 집에는 이미 외국인 부부 2명이 머물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온 데이비드(David)와 호주에서 온 로라(Laura). 이 둘은 4개월째 히말라야 산 중턱 마을, 담다미(Damdami) 마을에서 아이들을 위한 도서관과 방과 후 교실을 직접 운영하고 있었다. 특정 기관의 지원이나 정부의 도움 없이 지인들을 통해 모은 자금으로 유지된다고 한다. 말 그대로의 일상이 ‘봉사활동’이었다.

 

히말라야 중턱 마을 도서관에서 방과 후 수업을 받는 아이들

 

이틀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방과 후 교실에 참가하여 조금이나마 도움을 나눌 기회를 가졌다. 히말라야 중턱에서, 하얀 눈으로 뒤덮인 산을 바라보던 내게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선명해졌다. 바로 진정한 나눔을 실천하는 삶, ‘봉사’의 길이었다.

 

나눔을 실천하기 위한 준비

히말라야에서 돌아와 한국에서 대학교 마지막 학기를 보냈다. 동기들은 대기업과 언론사에 입사하기 위해 바쁘게 취업 준비를 했다. 하지만 나는 남과 다른 나만의 길을 가고 싶었다. 조금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 나눔이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국제 개발, NGO로 진로의 폭을 좁혔다. 대학 졸업 직전 여러 기관을 알아봤다.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에 인턴십을 지원했다. 그 결과 전공인 ‘광고홍보학’을 살려 홍보실에서 일할 기회가 주어졌다. 정부 혹은 국제협력단에서 진행하는 대규모 협력 사업의 전반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약 3개월의 인턴십을 보내는 동안 국제 개발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좋은 취지로 경제 성장력이 낮은 개발 도상국을 도와주지만, 우리는 ‘누구’의 입장에서 개발 사업을 진행하는지 궁금했다. 과연 저곳에 병원이 필요할까? 학교 건축사업은 이 시기에 가장 필요한 것일까? 그렇다면 현지 교사와 학생들은 충분히 조사가 선행되었을까? 어쩌면 선진국의 보여주기식 개발 사업은 아닐까? 개발 도상국의 지역 주민들의 입장과 목소리에 충분히 귀 기울였을까?

수많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덧붙이면서 꿈은 더 명확해졌다. 직접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부딪치며 일하고 싶었다. ‘지역 주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 안에서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모든 답을 직접 해당 국가에서 살면서 찾고 싶었다. 그리고 어느 날, 대학 졸업과 동시에 내가 원하던 기회가 완벽하게 찾아왔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를 통한 브릿지 사업이었다.

 

‘봉사’가 아닌 ‘자원 활동’

아프리카로 떠난다는 것에 대해 100% 확신이 있던건 아니었다. ‘봉사’란 남을 도와주는 것, 기꺼이 나를 희생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누구에게나 칭찬받을 수 있는 긍정적인 단어임에도 그 의미는 늘 마음 한 구석을 불편하게 했다.

봉사정신이 때로는 내가 그들보다 잘났다는 오만함을 가져다주지는 않을까.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을 그들의 삶에 개입하는 것이 괜한 오지랖은 아닐까…

다행히 나와 아프리카를 이어준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 브릿지 사업(UNESCO Bridge Africa Project)에서 고민을 달래줬다.  ‘봉사’가 아닌 ‘자원 활동’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일방적인 뜻이 포함된 봉사에 대한 관념에서 벗어났다. 한국의 청년들이 아프리카의 지역 주민과 마을에 거주한다. 함께 어울리며, 주민들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개발 사업이 뭔지 찾는 것이 목표였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 내가 가장 잘 하는 일로 어떻게 이들을 도울지 주민과 함께하며 살을 덧붙여 가는 ‘나눔’. 선한 영향력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자원 활동’. 이는 내가 지향하는 진정한 ‘봉사’였다. 

 

아프리카 레소토 디피링 마을 주민들과 농작물 수확 후 2010

 

인도 여행에서 깨달은 ‘나’의 존재. 새로운 언어와 다양한 문화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내 삶의 목표는 ‘나’를 통해 세상의 ‘다름’을 서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뚜렷한 나만의 철학을 지니고 나는 드디어 아프리카 땅에 올랐다.

 

왜 아프리카에 갔냐고?

남들이 생각하는 만큼 아주 대단한 무언가를 얻기보다

내 몸뚱어리만으로 자립해서 살아가는 아주 근본적인 삶에서 느낄 수 있는

삶의 행복과 즐거움을 찾고 싶었다.

온몸의 체중을 실어 두 발로 대지를 밟고 있는 마음은 열려있되 가슴은 원시적인 삶을 말이다.

손으로 직접 빵을 굽고 매일 아침 걸레질을 하고

더러운 옷과 신발을 깨끗이 닦아내는 법을 배우고

두 발로 온종일 마을을 돌아다니며,

내 정신을 육신으로 채워나갔다.

또 내 육신을 정신으로 채워나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깨달았다. 지난 7년 내 인생은 한 갓 낭비가 아니었다는 것을.

 


* 윗글의 사진 저작권은 김문주 님에게 있습니다.

 

 

김문주
국제활동가 | 아프리카에서 20대의 절반이 넘는 7년을 살았습니다.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현지 아프리카 지역 주민들을 위한 교육관련 사업을 담당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