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가 아닌 배움의 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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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 브릿지 사업은 말그대로 나와 아프리카를 연결했다. 2010년 4월 창설된 브릿지 사업은 ‘사람과 사람, 문화와 문화, 국가와 국가를 잇는 소통과 화합의 다리’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아프리카의 지역사회발전과 풀뿌리 교육 지원을 목표로 했다.

기존의 중, 단기 해외 파견 활동들이 ‘봉사’의 개념을 중심으로 학교나 병원을 지어주고 식량을 지원하는 구제사업에 치우쳤다면 브릿지 사업은 현지 주민들의 자립역량을 길러주는 데 초점을 뒀다. 오랜 연구 기간과 새로운 방향을 가지고 시작되는 사업인 만큼, 사업에 참여할 활동가를 선발하는 진행 과정도 조금 달랐다.

한국의 20~35세 사이의 젊은 청년을 대상으로 선발하는 브릿지 사업 1기 활동가 모집 공고에는 토익점수와 화려한 스펙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문화에 대한 편견이 없는 사람’이 활동가의 최우선 선발 요건 중 하나였다. 선발된 활동가들이 2년간 아프리카 지역에 파견되어 주민과 함께 살고 주민 스스로의 자립역량을 키워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서류전형, 심층면접, 그리고 2박 3일에 걸친 합숙면접까지 기나긴 선발 과정이 준비되어 있었다. 특히 합숙면접에서는 아직 현지어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의 활동가들과 영어가 서투른 아프리카 지역 주민 간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대처하는 문제가 출제됐다. 임기응변을 발휘하는 창의성과 어려운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상황을 해결하는 능력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많은 긴장과 설렘을 동시에 느끼게한 최종 합숙면접 합격 소식을 듣고 두 손을 박수 치며 기뻤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최종선발된 18명의 예비 활동가들이 파견되기 전, 앞으로 수행하게 될 업무에 필요한 지식, 소양, 경험을 습득하기 위해 국내 50일 훈련 교육을 수료해야 했다.

연수기간 중 아프리카 6개 국가의 청년대표가 한 명씩 방문해 현지어 및 생활 훈련 교육을 담당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아직 아프리카에 가기 전이었지만, 훈련 기간을 함께 해 준 청년들 덕분에 아프리카 지역의 생생한 정보를 익혔다. 조금이나마 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50일의 훈련을 마친 후, 드디어 나는 유네스코 브릿지 사업 1기 활동가가 되었다.

 

‘아프리카의 지붕’ 레소토

레소토라는 나라는 많은 이들에게 생소할 것이다. 이탈리아 음식 ‘리조또’가 연상되는 듯하다. 레소토를 지도로 짚어 위치를 설명하면, 다들 남아프리카 공화국(남아공)의 작은 도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는 브릿지 사업을 지원할 때부터, 마지막 합숙 훈련까지 파견국가 6개국(남아프리카 공화국, 레소토, 르완다, 말라위, 잠비아, 짐바브웨) 중 ‘레소토’에 가는 것을 희망하였다.

 

레소토 디피링 마을 2011 

 

이왕 국제 개발 협력에 참가한 이상, 한국인이 드물고 생소한 장소로 가고 싶었다. 또한 레소토는 ‘아프리카의 지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평소 산을 좋아했던 터라, 해발 3,000m가 넘는 고산지대의 장엄한 자연경관을 피부로 느끼고 싶다는 막연한 동경도 있었다. 그렇게 2010년 10월, 가슴 속 뜨거운 꿈을 안고 레소토에 도착했다. 2년 동안 자원 활동가의 이름으로 레소토에 파견되는 동안 필요한 체재비, 활동비, 왕복항공권 등은 일체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측에서 제공했다.

나를 포함한 3명이 레소토로 함께 파견됐다. 레소토에 도착하니 레소토 유네스코 국가위원회 담당자들과 우리가 파견될 지역을 직접 담당해 줄 현지 NGO 직원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소토 국제 워크 캠프를 담당하는 NGO에서 한국에서 온 청년 3명에게 각자가 파견될 지역에 대해 설명하고 우리의 관심과 기대를 물어보았다. 당시 꿈에 그리던 아프리카 땅에 도착했다는 설렘과 내게 주어진 2년이라는 시간에 대한 기대로 한껏 부풀어 있던 나였다. ‘기대하는 내용이 무엇이냐’에 대한 질문에 나는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지역 주민들과 가장 가까이서 이곳 레소토 전통 그대로의 삶과 문화를 배우고 싶습니다.

 

나의 2년의 보금자리가 된 마을이 정해졌다. 레소토 전통 그대로의 삶을 체험해 보고 싶다는 대답을 듣고 가장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로 파견해주었다. 레소토 수도 마세루에서 약 120km 정도 떨어져 있는 남쪽 마할레수크(Mohale’s Hoek) 지역에 위치한 아주 작은 마을, 디피링(Liphiring) 마을이었다. 레소토 유네스코 국가위원회 관계자분들의 도움으로 차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한창 달리다 보니 저녁 6시 해가 질 무렵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 위치한 초가지붕을 연상시키는 전통가옥이 나의 집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동굴처럼 어두운 방 안에서 자연스럽게 전깃불을 찾는 나를 발견했다. 하지만 디피링 마을은 마을 전체에 전기가 들지 않는다.당장 짐을 풀기 위해 성냥을 사용해 양초에 불을 밝혀야 했다.

 

레소토 디피링 마을에서 2년간 거주한 집

 

지난 24년간 도시 생활에 익숙했던 나는 간단히 성냥을 피우는 것조차 어색했다. 이곳에서 2년을 지낸다고 생각하니 순간 앞으로의 시간이 막막하게 느껴졌다. 우선 짐을 풀고 가지고 온 침낭에 들어가 첫날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을 느끼며 눈을 떴다. 어젯밤 내가 느꼈던 괜한 걱정과 두려움은 아침 햇살이 어둠과 함께 거둬갔다. 사람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라던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 괜한 욕심을 버렸다. 주어진 환경을 그대로 받아드리자 몸이 점차 적응하기 시작했다.  전기가 없었기에 촛불은 나의 가장 친한 밤 동무였다.  나무 장작으로 요리를 하고 등유 히터로 겨울을 보냈다. 짚으로 덮인 전통가옥 지붕 아래 천둥자리에 들어야 했다. 집 안에 화장실이 없기에 밤새 요강으로 해결했다.

그렇게 그곳에서 나는 2년을 살았다. 그 동안의 누렸던 모든 편안과 사치를 내려놨다. 평생의 잊지 못할 단 한 번뿐인 삶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쉽지 않은 2년이지만, 내 가족과 친구, 이웃을 남길 수 있었다. 

 

눈의 내리는 레소토 겨울 풍경 2012

디네오, ‘선물’이라는 뜻의 현지어

디피링 마을에 도착해서 부지런히 마을을 돌아다녔다. 집과 집 사이가 듬성듬성 떨어져 있던 마을이었지만, 가능한 많은 주민을 만나고 싶었다. 그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사업이 무엇인지 직접 답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적극적이었던 마음과 달리, 주민을 직접 찾아다니고 집을 방문하는게 쉽지만은 않았다.

그런 나에게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마을 대표였다. 미국과 영국에서 대학교수로 지내며 다양한 학문 활동을 해 온 마을 대표는 퇴직 후, 본인이 태어난 고향 마을로 돌아와 마을 발전에 기여하고 있었다.

마을을 헤매며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던 내게 그가 준 해결책은 마을 내 나의 ‘어머니’를 지정해 주는 것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70이 넘은 할머니, 메 타비타(Mme Tabitha)로 디피링 마을의 초등학교 초대 교장 선생님 출신이었다. 다행히 어머니는 영어로 소통이 가능했다. 시골 생활에 필요한 요리, 청소, 빨래 등 생활의 지혜와 노하우를 하나씩 가르쳐 주었다.

또한 마을에서 ‘조언자 역할’을 담당하신 어머니 덕분에 주민들을 만나고 그들과 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데 어려움을 차근히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내게 ‘선물’이라는 뜻의 레소토 현지어 이름인 디네오(Lineo)를 만들어 주었다.

 

디피링 마을 학부모들과 함께 2011

 

마을에서의 생활은 점점 익숙해졌다. 주민들과 깊은 관계 형성을 위해 내가 따로 노력한 점은 바로 ‘현지어를 습득하는 것’이었다. 레소토에서 대부분의 젊은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나 인근 국가인 남아공으로 떠난다. 남아있는 마을 주민의 대다수는 노인층과 어린아이들이었다. 학교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가르치긴 했지만, 나이 많은 어른신들과의 소통에는 문제가 있었다.

일상 속에서 틈틈이 현지어를 배우고자 큰 노력을 기울였다. 손바닥만 한 공책을 늘 가지고 다니면서 알아듣지 못했던 말, 하고 싶었던 단어, 문장을 적어두고 영어가 가능한 중학교 선생님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정해진 교과서나 문법책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마을에서의 생존과 주민들과 나은 소통을 위한 도구로 열심히 현지어를 배워나갔다.

내가 현지어를 배우면서 가장 처음 익혔던 문장은,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김문주입니다.”가 아니었다. “저는 결혼을 했습니다. 아이가 3명입니다.”였다.

마을을 벗어나 다른 지역이나 도시에 있을 때마다 젊은 동양인 여자에 대한 많은 남성의 호기심이 있었고 정중히 거절하는 방법으로 이 말을 가장 먼저 배우고 싶었다. 물론 그 아무도 내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나만의 방법으로 하루하루 연습한 현지어는 약 6개월의 시간이 지나자 주민과 고민, 생각을 나눌 수 있을 만큼 자연스러워졌다. 또 다른 소통 도구가 생긴 것이다.

 

우리 학교에 화장실이 생겼어요!

디피링 마을에 파견되어 첫 번째 사업을 진행할 수 있게 한화 약 100만 원의 예산이 주어졌다. 먼저 주민의 다양한 요구사항을 들어보았다. 그중에서 내가 주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고민했다. 초등학교 화장실 건축을 첫 번째 사업으로 선택했다. 많은 주민을 만날 수 있고 육체노동을 통해 서로 가까워질 기회였다.

2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있는 디피링 초등학교에는 아이들을 위한 화장실이 없었다. 학생들은 벽돌 몇 장을 쌓아두고 그곳에서 볼일을 봤다. 더욱 나은 위생시설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먼저 전교생의 학부모들을 전체 소집하여 요일별로, 마을별로, 그룹을 정하고 공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충당하기로 하였다.

 

마을 주민들과 초등학교 화장실 만들기 2010

 

공평하게 일에 참여하기 위해 출석 체크를 담당하는 대표도 선정했다. 결석에 대한 벌금을 내는 방식도 정했다. 마을에서 건축기술을 가진 남성을 건축가로 선정했다. 자발적으로 건축에 참여하는 학부모들 덕분에 제한된 예산으로도 첫 사업이 진행될 수 있었다. 

하지만 공사가 한창 진행되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11월, 벽돌을 나르고 시멘트 칠을 위한 우물물을 퍼 나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학부모들은 서늘한 바람을 기다리며 지각을 하는 일이 잦아졌고 그만큼 일은 지연됐다. 점심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배가 고파 일은 배로 힘들어졌다. 시간이 갈수록 학부모들의 결석률이 높아졌다.

결석이 잦아가는 학부모들을 불러들일 방법을 고민했다. 사진이 머리를 스쳤다. 사진을 찍어주는 건 나의 가장 큰 장기였다. 게다가 사진기가 익숙하지 않은 디피링 마을이었다. 공사 기간 동안 찍은 사진들을 인화하여 학교 벽에 붙였다. 예상했던 대로 아이들이 사진을 구경하며 물어보기 시작했다.

“왜 우리 엄마 사진은 없어요?”

“응, 왜냐하면 너희 어머니는 일하러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야. 네가 집에 가서 어머니께 설명해 드려 볼래?” 놀랍게도 어머니들은 다시 공사장에 찾기 시작했고 3개월이 훌쩍 지나 아이들을 위한 화장실이 완공됐다. 

 

중학생들의 성(性), 죽음 그리고 가족

마을에 도착하고 이틀 뒤 마을에 위치한 하나뿐인 중학교, 말레쩨마(Mmaletsane) 중학교에 초대를 받았다. 작은 도서관에 100명이 넘는 전교생이 모여 있었다. 간단히 나를 소개를 하는 시간이 주어졌고 아이들과의 첫 만남을 시작하였다.

“안녕하세요? 내 이름은 김문주이고 한국에서 왔습니다. 나이는 24살입니다. 앞으로 2년 동안 디피링 마을에서 여러분과 함께 지내면서 일할 계획입니다. 궁금한 내용이 있다면 자유롭게 질문해 주세요.”

“당신은 아이가 몇 명인가요?”

“아, 저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질문?”

“네, 그래서 당신은 아이가 몇 명 있나요?”

반복되는 아이들의 질문은 “몇 명의 아이를 가지고 있느냐”였다.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내 대답을 이해하지 못한 것인가 궁금해질 정도였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왜 질문이 반복됐는지 알 수 있었다. 디피링 마을에서의 20대 중반은 아이를 가지는게 당연했다. 심지어 중학생이라는 어린 나이에 조기 임신을 해, 학교를 중도 포기하는 여학생들도 많았다. 임신은 이곳에서 흔한 일이었다.

’10대 임신율이 왜 이렇게 높을까?’ 궁금증이 더욱 커졌다. 레소토 시골 마을에서는 우리나라와 달리, 청소년들이 방과 후 교실이라든지 학교 밖에서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문화거리가 따로 없었다. 도시의 청소년들이 쉽게 누릴 수 있는 영화관, 미술관, 체육관 등 학생들을 위한 놀이 시설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학교와 집을 오가며, 반복되는 하루에 학생들의 놀 거리가 무엇이 있겠는가? 놀랍게도 마을의 빈집이나 숲에 가서 학급 동료들과 성관계를 나누는 것이 하나의 놀이로 이용되고 있었다. 올바른 성문화와 교육이 전혀 자리 잡히지 않은 채 아이들의 성문화가 일상 속에 만연했다.

이런 아이들에게 과연 나는 어떤 역할이 되어줄 수 있을까? 많은 고민 끝에 아이들에게 ‘할 일을 나누자’는 취지로 방과 후 동아리 시간과 방학 기간 동안 함께 마을 신문 만들기 동아리를 만들기로 했다. 그렇게 1주일에 2번씩 우리는 꾸준히 만났다. 학교 정규수업 후, 매번 빈 교실 찾아다니며 활동했다. 이런 모습을 기특하게 여기셨는지, 교장 선생님의 도움으로 동아리실을 받을 수 있었다. 마침내 우리만의 아지트가 마련됐다. 우리는 어렵게 찾은 아지트를 청소하고 페인트칠 하며, 제법 그럴싸하게 만들었다.

 

중학교 신문 만들기 동아리 학생들과 함께

 

신문 만들기에 필요한 본격적인 교육과 훈련을 시작하기 전에 아이들과 친해질 방법을 여러모로 고민했다. 아이들과 서로를 알아갈 방법이 뭘까? 동시에 글 연습을 할 수는 없을까? 고민 끝에 아이들에게 빈 종이 3장과 펜을 주면서 ‘각자가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써볼 것을 제안해 보았다.

각자가 적게는 14년, 많게는 16년 정도의 삶을 살아오면서 느낀 나만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풀어보는 시간이었다. 약 2시간이 지난 후 아이들은 빼곡히 적어 내려간 나만의 이야기를 조금은 부끄럽고 서툰 방식으로 내보였다. 그 중, 나의 마음을 울린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난 아버지가 너무 미웠어요.
우리 아버지는 이웃 나라 남아프리카공화국 광산에서 일했는데
매일 술만 마시며 하루하루를 보냈어요.

혼자서 우리를 키우는 어머니에게 충분한 돈을 가져다주지 않았고
자식들이 어떻게 학교에 다니는지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날마다 술을 마시던 아버지가 우리 곁을 영영 떠나버렸어요.
그런데 나는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버지의 죽음이 슬펐어요.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아버지인데, 나를 이토록 아프게 할 줄은 몰랐어요.

가족의 인연이란 참 알 수 없나봐요.

 

레소토 시골 마을에서 최소 한 달에 한 번 이웃의 장례식에 참가했다고 말하면 믿을 수 있을까? 디피링 마을은 에이즈 (HIV/AIDS) 감염, 결핵, 그리고 다른 질병, 사고들로 이웃들이 소리 소문없이 죽음을 맞이한다. 부모, 형제, 자매, 자녀를 잃는 일은 허다하기에, 이곳의 사람들은 죽음의 아픔을 크게 느끼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완전히 착각이었다. 나만의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아무리 밝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자신만의 아픔과 비밀은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 디피링 마을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모두에게는 아픔과 슬픔이 존재했다.

 

들판에서 뛰놀던 디피링의 미래

마을 내 꼬마 아이들이 들판에서 뛰어놀고 있다. 한참을 유치원에서 공부하고 있어야 할 시간인데 왜 놀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렇다. 마을에는 유치원이 없었다. 레소토 정부에서 무상으로 지원하는 초등학교로 진학하기 전까지 유아들은 유치원가 가지 못한다. 유아교육이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정부의 지원이 없다. 주민이 자발적으로 가르치지 않는한  어린 아이들은 들판에서 뛰노는 거 말곤 할게 없다.

내가 자원활동가로 디피링 마을에 왔을때 주민들은 내가 유치원 선생님이 되어주길 가장 기대했다고 한다. 평소 아이들을 좋아하고 유아교육에 관심이 많았지만, 유치원 교사 제안을 받았을 때 기쁘기 보다 걱정이 더 컸다. 왜냐하면 나는 2년 후 마을을 떠날 사람이었고, 내가 떠나고 난 후 유치원이 어떻게 운영이 될지에 대한 걱정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을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였기에 유치원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만 2~5세의 유아가 있는 학부모들을 먼저 조직했다. 왜 아이들에게 유아교육이 필요한지 논의한 후,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수업료를 책정하기로 했다. 

다음 단계는 ‘선생님’을 구하는 것이었다. 도시에서 정식 교사자격증을 갖춘 교사들은 전기도 수도도 없는 시골 마을에 살고싶지 않았다. 자격을 갖춘 교사들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고등교육을 마친 청년들은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난지 오래였다.

 

유치원 아이들 소풍 모습 2011

 

선생님을 구하는 데만 꼬박 1년의 세월이 걸렸다. 마을을 떠나지 않고 꾸준히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헌신적으로 담당해 줄 수 있는 교사를 찾을 수 있었다. 비록 전문 교육대학을 졸업한 정식 교사는 아니었지만, 레소토의 교육부에서 제공하는 교사훈련 연수프로그램에 참여할 자격을 갖춘 고등교육 졸업자였다. 고등교육을 졸업하고 영어와 현지어(세소토) 구사할 수 있는지가 최우선 자격요건이었다. 유치원 교사에게 필요한 자질과 역량은 꾸준한 연수프로그램을 통해 보충될 수 있었다.

마침내 아이들을 위한 교육이 시작되었다. 당장의 수업을 진행할 수 도록 빈집찾아 교실로 사용했다. 유아 학생 수가 8명 남짓이었기에 큰 규모의 교실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었다. 조직된 학부모운영위원회 어머니들과 함께 빈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새롭게 벽지를 칠했다. 유치원을 만드는데 주민의 손길이 거쳐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렇게 디피링 마을 발전의 씨앗, 아이들이 자랄 수 있는 교육이 시작됐다. 

 

 


* 윗글의 사진 저작권은 김문주 님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