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으로 떠났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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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국

드디어 미국 샌프란시스코 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동안 스쳐 갔던, 또는 비껴갔던 인연들은 이미 내 한참 뒤에 점이 되어 있었다. 맛대가리 없는 기내식을 두어 번 씹으며, 잠이 오지 않는 상공에서 캔디크러시소다 게임을 다섯 시간 정도 했을까. 다행히 옆자리 미국인은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공항에 도착했고 입국수속에서 UC 버클리로 석사과정을 하러 왔다는 증명서류를 수속관에게 건네주자 그는 대뜸 물었다. “Do you like Cardinals?” 나는 야구팀 세인트루이스 Cardinals를 말하는 줄 알고 일단 “Yes”라고 했다. 괜히 싫은 것보단 좋은 게 좋은 거겠지. 그런데 그는 말했다. “You can’t pass.”

 

나는 화들짝 놀랐다. 아니 좋고 싫은 거는 지 맘이지. 아무리 미국이 유학생이나 이민자에게 박할 때가 있다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예상치 못한 시련에 당황하는 나에게 그는 웃으며 말했다. “We’re Bears, we should hate Cardinals.” 그제야 나는 이게 UC 버클리와 라이벌 관계인 스탠퍼드의 팀 명칭인 Cardinal임을 알았다 (UC 버클리는 Bears다). 알고 보니 이분도 우리 학교 출신이라 나에게 이런 농담을 한 것이었다. 시작부터 바스러질 뻔한 멘탈을 부여잡고 나는 “I hate Cardinals.”라고 말했고 그는 이제야 내가 미국에 올 준비가 되었노라고 웃었다.

드디어 공항에서 나오자, 캘리포니아 야자수 몇 그루가 나를 반겼다. 

 

입주

UC 버클리에 이미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이 나를 맞아주었다. 나는 개강까지 1달 남짓이 남아있었고 그동안 이 친구 집에 기생하면서 새집을 찾을 요량이었다. 생각보다 집 렌트는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Craigslist, Zillow, 페이스북 페이지 등 온라인으로 알아볼 수 있었지만 조금만 괜찮아 보이면 게시글이 올라온 지 5분 만에 닫혔고 그 외에는 전부 한 달에 1600달러 이상 하는 비싼 방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월 1000 이하의 방을 알아보고자 매일 아침, 점심, 저녁마다 수시로 확인했다. 오픈 하우스에 갈 때마다 5팀 정도는 집을 보러 왔던 것 같다. (서로 간 은근히 경쟁의 눈빛으로 쳐다보곤 한다) 올해가 미국에서의 첫해인 나는 신용점수는커녕, 제대로 된 신분증조차 없었기에 항상 경쟁에서 뒤처지곤 했다.

그렇게 2주간 알아봤을까, 드디어 학교 앞에 위치한 2 bedroom 1 bathroom 아파트를 찾았다. 다만 가격이 월 2500이라 같이 룸메이트 하기로 한 사람들 2명을 포함해 3명이서 지내기로 했다. 나는 큰 방이라 950, 룸메이트들은 각각 작은 방 850, 거실 700으로 나눴다.

아파트는 다 쓰러져가는(=아직 쓰러지지 않은) 기품 있는 건물이었고 엘리베이터는 층에 골골골 도착하면 손잡이로 삐걱이 문을 직접 열어야 하는 최신 골동품이었다. 집 앞에는 캘리포니아 기관에서 온 공문이 붙어있었는데,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집은 지진이 발생할 시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입주민들에게 반드시 알려야 합니다.

 

아직 서 있는 게 기적인 그 아파트

 

당연히 에어컨 따위는 없는 친환경 건물이라 나는 무더운 한여름 밤에 샤워를 두 번씩 했다. 선풍기를 사기에는 사치스럽다고 느꼈다. 겨울이 되면 통풍이 잘되는 나무로 만들어진 덕에 여름에 그리웠던 찬 바람을 뒤늦게라도 만끽할 수 있었다. 두꺼운 이불을 세 겹을 덮었다. 그래도 나는 마냥 행복했다.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언젠가 이루리라고 마음먹은 미국 유학의 첫걸음이었고 만나는 사람들은 항상 친절해서 생활의 부족함을 금방 잊을 수 있었다.

 

영어

차가 없어서 우버를 타고 이동하곤 했는데 처음 탔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목적지로 가던 도중 중간에 내리는 게 더 나았다는 걸 깨달았으나, “여기 내려주세요”라고 할 영어 문장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Can I ____ here?”까지는 기똥차게 생각해냈으나 적당한 동사가 맞춰지질 않았다. 그러면 “Can you ____ me here?”라고 말해보려는데 또 여기에 맞는 동사는 2009년도 수능 외국어 영역에 출제된 기억이 없었다.

결국 나는 기는 목소리로 말했다. “Can I … (적당히 땅을 가리키는 손가락) here?” 눈치 좋은 우버 기사는 즉시 브레이크를 밟아주었다. 아마 기사님도 영어가 어려우실 거야 라고 생각하며 내리자마자 바로 검색했다. 나는 이제 이것들을 평생 잊지 않으며 나중에 내 묘비에도 써놓으리라 마음먹었다.

 

“Can I get off here?”

“Can you drop me off here?” 

 

의외로 전공 공부는 영어가 어려움을 주지 않았다. 학부 때부터 원어 전공 서적과 영어 강의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듣기는 편했다. 오히려 친구들과 점심시간에 사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쉽지 않았다. 언어의 장벽이 아니라 문화의 장벽이 문제였다.

친구들은 넷플릭스, HBO 시리즈에 등장하는 인물, 지명, 밈 등을 자유자재로 이야기하는데 나는 잘 알아듣지 못했다. 대신 음악 이야기를 할 때면 초등학교 시절부터 쌓아온 락, 힙합, 팝에 대한 지식 덕분에 재밌게 농담까지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집에 돌아와서 왕좌의 게임을 1편부터 정주행했다. 처음엔 재미로 보기보다 미국인들과 조금이라도 더 공감하고 싶어서 꾸역꾸역 봤다 (물론 나중엔 재밌어서 봤다). 그렇게 매일 2-3편씩 2달간 하루도 빠짐없이 달려서 드디어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넷플릭스 시리즈를 일일이 보지는 않더라도 제목과 대강의 스토리를 알아둬서 언제든지 아는 척이라도 할 수 있는 준비를 했다.

 

이렇게까지 했던 이유 중 하나는 나는 언제나 내가 사람들에게 재밌는 사람으로 기억되길 원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술자리는 빠지지 않으며 어떻게 하면 기발한 표현으로 이 상황을 표현할까, 집에 돌아오는 길에서도 오늘 했던 대화를 곱씹으며 어떻게 하면 더 웃겼을까 복기를 했더랬다. 이런 나의 성향은 미국 와서도 마찬가지였으나 내 제한된 영어 표현으로는 당연히 한계가 있었다.

그때 나를 사로잡았던 코미디언은 코난 오브라이언이었다. 그는 남을 적당히 놀려먹으면서, 자조적인 멘트로 스스로를 낮출 줄도 알며, 재치 있는 멘트를 쉬지 않고 날릴 줄 알았다. 나는 그 표현을 머릿속에 욱여넣고 한 번씩 꺼내 써먹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나 무지 배고프다”라는 말을 “지금 나는 cardboard(골판지)라도 씹어먹고 싶다”라고 표현하는 식이다. 이는 꽤 잘 먹혔는데, 덕분에 몇몇은 나를 crazy Korean으로 불렀다. 나에겐 이보다 더한 칭찬은 없다. 

 

다만 부작용이 있는데, 미국 스탠드업 코미디가 그렇듯이 모든 표현이 과격해진다는 것이다. “I’m so happy” 대신에 “I can die tomorrow”라고 말하는 느낌 같이. 그래서 개인적으로 친하지 않을 때는 적당히 재미없는 멘트 7 이상한 멘트 3으로 시작해서 이상한 멘트 비율을 점차 올리는 것을 추천(?)한다. 

 

한국에서 ‘영어 재밌게 배우기’를 가르치는 수십만 개의 학원과 인터넷 강의처럼, ‘영어로 재밌게 말하기’도 언젠가 가르치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