펴다_각자의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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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다¹ 접히거나 개킨 것을 젖히어 벌리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모험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이다. 스릴넘치기로 소문난 놀이기구에는 줄도 서지 않으며, 낯선 사람, 모르는 길, 처음 보는 음식은 경계대상 1호다. 여행을 갈 때는 교통편과 숙박을 예약해야지만 마음 편히 타국의 정취를 즐길 수 있는 사람, 공중화장실의 덮어진 변기 뚜껑을 구태여 열어보지 않는 사람이다. 새로운 것이 주는 자극보다 익숙한 것들이 주는 편안함이 좋고, 가려진 부분을 들춰보고야 말겠다는 호기심도 없는 나 같은 사람이 세상에는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약 500g 무게의 종이 뭉치, 그것이 눈앞에 있으면 못 견디게 펼쳐보고 싶다. 빼곡히 겹쳐진 종이 사이를 가르고, 젖히고, 벌려서 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확인하고 싶어 안달이 난다. 펼쳐진 틈 사이로 가름끈을 찔러 넣고, 활자 위로 선을 긋고, 종이 한 귀퉁이를 접는 모든 행위를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즐긴다.

나는 책을 펴는 행위를 사랑한다.

 


 

펴다²움츠리거나 오므라든 것을  곧게 하다.

운동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가급적이면 가벼운 스트레칭만이라도 하려고 노력한다. 최근에는 요가 수업을 끊어 사지와 정신을 동시에 늘려보려는, 몸치로서는 제법 대담한 시도도 하고 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스트레칭의 효과’를 검색해보면 다음과 같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부상 방지와 체력단련 및 피로 회복. 관절의 가동범위를 넓혀 유연성 향상. 신체 지각력 발달 및 순환 촉진. 굽고 굳어진 몸을 펴는 행위는 거의 만병통치약에 가까울 정도로 다양한 효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마음’은 어떨까? 마음은 몸보다 쉽게, 조급하게, 과격하게 오그라든다. 카메라에 찍힌 내 얼굴이 속수무책으로 못생겨 보일 때, 나보다 한발 앞서나가며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먼저 쟁취하는 동료를 볼 때, 또다시 연애에 실패했을 때, 아무리 울어도 세상에 슬픈 일이 끊이질 않을 때… 마음은 매번 매 순간 움츠러든다.

굳은 몸에 스트레칭이 필요한 만큼, 오므라든 마음에도 ‘펴는 행위’가 간절히 필요하다.

 

 

이쯤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펴는 행위’와 ‘책을 펴는 행위’를 연관 짓고 싶어진다. 책을 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언젠가는 반드시, 이런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해답을 찾는 심정으로 책장 앞을 서성이는 순간, 그러다 ‘우연히 집어 든 한 권의 책이 나의 문제와 조응하는 순간(김영하)’. 그럴 때면 구겨졌던 우리의 마음은 서서히 팽창한다.

 


 

펴다³ : 생각, 감정, 기세 따위를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표현하다

책을 펼칠 때 내가 기대하는 것은 ‘타인의 기록이 내게 맹렬하게 파고드는 느낌’이다. 이 기세는 정말이지 엄청난지라, 호기심이라고는 없는 쫄보를 집요한 관찰자로 만들기도 하고, 상처받아 진득하게 들러붙은 마음을 좍좍 펴주기도 한다. 그뿐인가. ‘삶을 성숙하고 단단하게 붙잡도록 해주고(헤르만 헤세)’, ‘삶에 대한 사랑을 받아내는 그릇이 되어주며(이성복)’,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세계와 영겁의 시간에 접속하게 해준다(김영하)’. 책을 펼칠 때 우리가 얻는 이점은 역사 속 모든 작가의 수만큼 무궁무진하다.

 

 “독서는 제게 여흥이고 휴식이고 위로고 내 작은 자살이에요. 내가 모든 걸 잊고 떠날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우주선이에요.” _ 수전 손택

 

책을 읽을 때면 1만 3천 원 가량의 경제적 비용, 3시간 남짓의 시간적 비용(종종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도 한다)이 발생한다. 합리적 동물이라는 인간이 이 비용을 기꺼이 지불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책을 펼침으로써 열 수 있는 문이 우주의 별만큼이나 많기 때문이다.

펴자. 그 순간 작은 우주선에 올라타 어디로든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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