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학도가 왜 디자이너가 됐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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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아깝긴 하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물었다. 이렇게 디자이너가 되어서 기계공학을 공부했던 오랜 시간이 아깝지 않냐고. 6년간 수학과 물리 공식에 흠뻑 빠져서 지냈는데, 전혀 상관없는 색깔 고르기나 하기에 그 지식들이 아깝지 않냐고. 나는 그럴 때마다 이야기한다. ‘좀 아깝긴 하다’고.

공학 공부로 보낸 시간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했다. 보통 논리는 엔지니어링 지식이 디자인에 때로 도움을 주기도 하며, 세상을 보는 눈에 새로운 단면을 보여준다는 식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베르누이 방정식, 푸리에 변환, 열역학 1 법칙 등은 내가 하는 디자인에 어떠한 부분도 도움을 주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꿈이 자주 바뀌어왔다. 초등학교 때는 사이버 포뮬러 만화에 심취해 카레이서가 되고 싶어 했고, 게임이 좋아진 뒤로는 게임 제작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었다. 카이스트 입시 면접에서는 교수님들 앞에서 “산업디자인과 전자공학을 복수전공해서 무언가를 발명하겠다. 남이 원하는 것을 만들지 않고, 내가 만드는 것을 남이 원하게 만들겠다.”라고 뻔뻔하게 소리쳤다. 

재미있게도 항상 뭐든 결심을 한 후에는 길의 방향이 휘었다. 카레이서는커녕 오락실 레이싱 게임에서도 1등 하지 못했고, 당시 게임 개발은 대표적인 3D 업종이었으며, 산업디자인도 전자공학도 복수 전공도 아닌 기계공학 단일 전공을 했다. 이후 기계공학을 전공하던 중에도 어려서부터 관심이 있었던 로보틱스를 하려다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재미없음을 깨달았다.

 

Who am I?

그런데 이를 조금 다르게 변명해보면,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미래의 나는 무엇을 하게 될까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고민했으며,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슨 재능이 있는지, 남들이 없는 나만의 무기는 무엇인지 끊임없이 스스로를 평가하고 시험했다.

하지만 나의 길 설정을 해본 사람들은 모두 공감할 것이다. 스스로를 평가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일은 항상 좌절을 수반한다. 나보다 먼저 그 길 위에 있는 사람들은 훨씬 전부터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고, 지금도 앞으로도 ‘나만의 무기’는 있을 수 없다. 외부 환경도 나를 밀어내는데, 미국에서 취업하고자 했을 때 기계공학은 실리콘밸리에서는 수요보다 공급이 넘쳐나는 분야였다. 나는 다른 일을 알아봐야 했다.

예전의 나는 그것을 ‘현실과의 타협’이라고 여겼지만 사실은 좌절과 회귀의 연속이 더 옳은 표현이었을 것이다. 단지 실패의 낙인이 내 주름살에 새겨지는 것을 싫어했을 뿐이다.

 

나도 모르는 ‘내가 좋아하는 것’

디자인에서는 재밌는 딜레마가 있다. 사람들이 좋아할 것을 그리는 것이 좋은 디자인이지만, 사람들은 무엇을 좋아하는지 사실 잘 모른다. 대학교를 입학할 당시, 아이폰 3GS를 손에 쥐기 전까지는 스마트폰을 왜 이용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고등학생 때 친구가 보스 헤드폰을 빌려주기 전까지 음질이 노래를 감상하는 데 그렇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몰랐다. 최근에는 스마트 전구를 구입했는데, 침대에 누울 때 ‘불 끄기’를 깜빡해 자책했던 지난날을 삶에서 말끔히 없애 줬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유저 리서치에서 인터뷰가 여전히 중요하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관찰이다. 가장 큰 차이점으로 인터뷰는 소비자의 생각을 온전히 뽑아내는 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관찰을 하게 되면 관찰자의 통찰력에 따라 소비자 스스로도 몰랐던 무궁무진한 정보를 쓸어올 수 있다.

가령, 여성 스마트폰 유저와의 인터뷰에서 무겁고 큰 스마트폰을 사용할 때 겪는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자. 여성을 위해 작고 귀여운 스마트폰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여성 유저가 스마트폰으로 셀카를 찍을 때 힘들게 뻗친 약지의 힘줄을 ‘관찰’할 수 있다면 스마트폰 뒷면에 부착하는 링 홀더를 발명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디자인에서 배우는 것들을 나의 삶에도 적용해볼 수 있다. 나는 무엇이 되고 싶다, 무엇을 이루고 싶다고 하루에 몇 번이고 되뇌지만 사실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모르고 있다. 그 내적 고민의 연속이 해답이 되지 않았던 이유는 그동안 스스로를 향한 관찰을 등한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가에서 명상을 통해 내 몸의 소리에 집중하는 법을 강조하듯이 스스로를 객관화해보고 제3자의 시선으로 내가 걸어온 길을 조감해서 본인의 본능에, 변화하는 열망에, 솔직한 본질에 집중해보는 것은 어떨까.

 

결국 내가 이루고자 한 것은

까짓 나는 돈도 잘 벌고 싶고, 끝내주는 결과물도 내고 싶고, 남들이 나를 바라볼 때는 존경이 담긴 시선이었으면 한다. 그게 나를 밤새서 공부하게 만들고, 회사에 늦게까지 혼자 남아서 완성된 디자인을 갈아엎고, 매니저가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디자인을 이해하지 못하면 발끈해서 다음날 브랜딩이 필요한 이유를 프젠테이션으로 준비해서 가게 하는 힘이다. 필요할 때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적응할 수 있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욕심과 집착이 지금의 나를, 앞으로도 변덕스러울 나를 지탱하는 한 가닥 철학인 셈이다.

언젠가 내가 가끔 끄적이는 (=가끔 이불킥을 유발하는) 글 중에 이런 게 있다. “나는 작은 성공에서 가장 슬프게 운다.” 나에게 일련의 작은 성공들은 그 단편적인 한 발짝에 인생을 내건 비루한 일희일비의 결과물이며, 더 큰 본질을 바라보면서 올바르고 무모한 도전을 하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이루려고 했는가?

이 질문의 근원의 근원을 파고들다 보면 도달하는 지점은 같았다. “사람들을 놀라게 해주고 싶다”라는 가장 원초적인 관종의 본능. 그것을 나는 유튜버나 방송인이 아닌, 좀 더 고상한 레벨에서 이루고 싶었던 것이다. 이를 인정하고 나서야 나의 방향을 재설정하는 일은 더 이상 슬픈 경험이 아니게 된다. 나의 결과물을 보고 놀라줄 사람들이 있는 한 여정은 계속되는 셈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