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다_한 권의 책이 내 세계를 휘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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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소설가 오르한 파묵이 쓴 책 <새로운 인생>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첫 장에서부터 느껴진 책의 힘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내 몸이 앉아 있던 책상과 의자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정도였다.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과거의 어떤 장면을 떠올렸다. 테이블 위에 놓인 하늘색 책, 물방울이 맺힌 아이스 커피잔, 초여름 볕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넓은 창문, 그 너머로 보이는 제주의 바다. 2017년 초여름, 휴가차 떠난 제주도의 한 카페에서 나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오르한 파묵의 말을 빌려서 표현하자면 ‘나를 둘러싼 세계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하는’ 경험을 한 것이다.

제주 여행은 그때가 두 번째였다. 첫 번째 여행이 고등학교 수학여행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첫 여행이나 다름없었다. 한라산 중턱에 있는 조용한 호텔에 짐을 풀고 제주의 풍경을 만끽했다. 색이 화려하고 커다란 곤충, 잎사귀 끝이 동그랗게 말리는 이름 모를 풀, 구멍 난 돌들. 모든 게 흥미로웠다. 무섭도록 짙게 깔린 안개와 기묘하게 일그러지는 바다 물결에도 자주 시선을 빼앗겼다. 동문시장에 들러 마감 세일 중인 갈치회와 고등어회를 싼값에 사 시원한 술과 함께 먹었다. 여행지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모두가 활기차고 행복해 보였다.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여행이 되어가고 있었다.

 

초여름이 빠르게 겨울로 바뀌고… 

사나흘을 신나게 놀고 난 후, 그제야 집에서 가져온 책이 생각났다. ‘좋은 곳에서 좋은 책을 읽고 싶다‘며 심사숙고해 골라온 책이었다. 나는 책을 가방에 넣고 길을 나섰다. 한쪽 벽면이 전부 통유리로 되어있어 ’씨 뷰‘가 아름답기 그지없는 카페에 앉아, 김애란 작가의 신작 소설집 <바깥은 여름>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첫 수록작인 <입동>을 읽으며, 나는 나를 둘러싼 계절이 초여름에서 겨울로 빠르게 변해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책 속에는 봄과 여름을, 가을과 겨울을 다섯 번도 채 겪어보지 못하고 죽은 영우가 있었다. 아이의 사망보험금에 차마 손도 대지 못하고 허물어져 가는 부부가 있었다. ‘자식 잃은 부모는 뭘 먹고 뭘 입고 사나’하며 쳐다보는 사람들, 어린이집 차에 치여 죽은 아이가 있는 집에 ‘감사 선물’이라며 복분자 액을 보내는 무심한 어린이집 직원들도 있었다. 부부는 안간힘을 내 새 삶을 꾸려보려 한다.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을 추스르듯 상해버린 벽지를 뜯어내고 새 벽지로 도배를 하던 날, 벽 한 귀퉁이에서 어린 아들이 쓰다만 이름을 발견한다.

“영우가 자기 이름… 써놨어.”

 아내가 떨리는 손으로 벽 아래를 가리켰다.

 “근데 다… 못 썼어…”

 아내의 어깨가 희미하게 떨렸다.

 “아직 성하고… 이응하고… 이응하고, 아니 이응밖에 못 썼어…”

_김애란 <입동> 중

쓰다만 아들의 이름을 보며 우는 엄마, 그 곁에서 풀 먹인 벽지를 든 채 우는 아빠. 나는 그들과 함께 온 힘을 다해 울었다. 머리가 띵해지고, 코가 쓰라리도록 울었다. 울 수밖에 없어서 울었고, 울어도 슬픔이 가시지 않아 울었다. 겨우 마음을 가누고 고개를 들어 바다를 바라보았다가 이내 다시 엎드려 울었다. 초여름의 태양을 머금어 건강해 보이던, 찬란하던 바다는 온데간데없었다. 바다에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 그래서 바다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었을 사람들, 혹은 바다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을 사람들만 계속해서 떠올랐다. 누군가의 슬픔과 울음을 속절없이 삼켜버렸을 검은 바다가 눈앞에 있었다. 오르한 파묵의 첫 문장처럼, 나를 둘러싼 풍경이 송두리째 변해버린 것이었다.


이내 곧 타자가 되어 버리는 경험 

“책은 여전히 내 얼굴에 빛을 비추며 책상 위에 놓여 있었지만, 방에 있는 다른 친숙한 물건들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지금 내 앞에 놓인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생의 존재를 놀라워하며 받아들이는 동시에, 이토록 강렬한 힘으로 내 삶을 바꾸어 놓은 이 책이 사실은 평범한 물건임을 인식하고 있었다.”_ 오르한 파묵 <새로운 세계> 중에서

 

나는 아직도 종종 그날의 바다를 떠올린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건만, 모든 것이 변해버린 순간에 대하여. 한 권의 책. 이 평범한 물건이 내 세계를 어떻게 휘저었는지, 나의 계절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한다. ‘독서란 한 사람이 다른 정체성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그 안에 자리를 잡는 행위’라던 파스칼 키냐르의 말이 생각난다. 책을 읽는 행위란 글을 보고 파악하는 행위, 작가의 작품을 보는 행위를 넘어 사람의 뜻이나 마음, 상황을 알아차리는 행위다. 적극적으로 화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가, 이내 곧 그 타자가 되어버리는 행위다.

산수유와 개나리가 한데 섞인 4월의 풍경이 한껏 화사하다. 바깥이 잘 보이도록 창을 활짝 열고 책을 펼친다. 볼에 닿는 바람이 보드랍다. 2017년 초여름 제주에서 그랬듯, 어쩌면 오늘도 또 한 번 다른 계절이,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마다 할 이유가 없다.

 

1 COMMENT

  1. 책 뿐만 아니라 글 읽는 자체가 참 의미있고 좋은 행위라고 생각해요 🙂 저는 특히 밥 먹을 때 밥상 더럽지 말라고 밥상 위에 신문을 깔아놓는데, 부모님이 음식 준비하시는 동안 신문 속 기사를 자연스럽게 읽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잘 보이는 곳에 글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읽기 행위가 가능해지는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