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다_단 하나뿐인 ‘나’를 잊지 않겠다는 의지

‘기록’에 대한 첫 번째 단상, 소크라테스의 말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만약 인간이 이것(글)을 배우면, 이것이 그들의 영혼에 망각을 심을 것이다. 사람들은 더는 기억력을 쓰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문자에 의존하게 되면, ‘무언가에 대한 기억을 자기 내부에서 가져오는 대신, 외부에 표시해둘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우리는 정말 그렇게 되었을까?

  

‘기록’에 대한 두 번째 단상, 사적인 기록의 역사

많은 사람이 그렇듯, 내 기록의 역사도 일기에서 시작되었다. ‘오늘의 날씨 이야기’로 시작해 ‘참 즐거운 하루였다’로 끝나는 뻔한 일기. 너무나 뻔한 나머지 거짓말까지 섞여 있어서 개학 무렵이면 하루에 열 개, 스무 개라도 한 번에 써낼 수 있는 그런 기록이었다. 중학교 때에는 친구들과 비밀 교환일기를 쓰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 볼일도 없는, 예를 들면 누가 누구와 쪽지를 주고받는 걸 보았네, 누가 누구와 엑스 동생 사이네, 같은… 하여간 골고루 변변치 않은 내용의 비밀 일기였다. 20대가 되고 나서부터는 해마다 다이어리를 한 권씩 썼다. 일상은 없고 일정만 있는 건조한 기록이었다. 

‘글을 쓰고 싶다’라는 생각을 본격적으로 한 것은 서른 무렵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축적된 기술도, 경험도 없었기에 쉽게 무언가를 쓸 엄두가 나질 않았다. 겨우 쓴 문장을 지웠다 다시 쓰고, 또 지우기를 반복하며 나는 스스로에게 처음으로 물었다.

너는 도대체 왜 쓰려고 하니?’

이런저런 멋진 대답을 궁리하는 사이 떠오른 다음 질문에 나는 끝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굳이 너까지 써야 하는 이유가 뭐니?’

대답 여부야 어찌 되었든, 나는 지금도 글을 쓰고 있다. 짧은 에세이들을 쓰고, 읽고, 고치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고, 절망도 딱 그만큼 반복하고 있다. 생각은 초라하고 비루하며, 표현은 촌스럽고 상투적인지라 한 문장 한 문장을 쓸 때마다 온몸으로 퍼지는 거북함을 여러 번 견뎌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으레 대답하지 못한 두 번째 질문이 수면 위로 떠 오른다. ‘탁월한 재능도 없는 내가 굳이, 왜 뭔가를 써야만 하는 걸까?’ 

 

‘기록’에 대한 세 번째 단상, 박완서의 말

사십여 년간 수많은 걸작을 선보이다 2011년 영면하신 박완서 선생님은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단편소설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를 통해 자신이 ‘소설을 쓰게 된 이유’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으며 살아온 그녀는, 그들을 소설에 등장 시켜 마음껏 경멸하고 징벌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분노에 기반한 이 다급한 ‘증언의 욕구’는 이상하게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결국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난 후에야 이 ‘증언의 욕구’는 결실을 보는데, 이를 가능하게 했던 새로운 동력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세월이 지나도 식지 않고 날로 깊어지는 건 사랑이었다. 내 붙이의 죽음을 몇백만 명의 희생자 중의 하나, 곧 몇백만 분의 일로 만들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의 생명은 아무하고도 바꿔치기할 수 없는 그만의 고유한 우주였다는 게 보이고, 하나의 우주의 무의미한 소멸이 억울하고 통절했다. 그게 보인 게 사랑이 아니었을까. 

–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중

글을 쓰는 이가 기록하고자 하는 것은 단 하나의 ‘고유한 우주’다. 몇백만 분의 일이 아닌  단 하나. one of them이 아닌 only one. 통계나 평균으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온전한 한 사람의 사연이다.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은 사랑한다는 말과 동일하며, 망각하지 않고 새기겠다는 의지와 동일하다.  

 


 

다시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떠올려보자. 글은 정말로 우리의 영혼에 망각을 심는 데 성공했을까? 그런 것 같지 않다. 글은 내부의 기억을 바깥으로 끌어내고 타인에게로 발화시킨다. 우리가 무언가를 기록할 때, 지나간 사연과 찰나의 사유는 끈질기게 추적당하고, 끝끝내 종이 위로 딸려 나온다. 

차마 대답하지 못한 나의 질문으로도 돌아가 보자. 왜 굳이 나까지 써야 하는 걸까? 단 하나뿐인 나의 사연들과 사람들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 사랑이 가득 담긴 ‘기록에의 의지’라고 해두자. 비록 초라한 글솜씨라도 덜 부끄러울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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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댓글

  1. 동감합니다 🙂 저는 짧게라도 매일 일기를 쓰려고 하고 있어요. 일기를 쓰는 이유는 내 지나간 과거와 추억을 기억하고 싶어하는 제 의지라고 생각해요. 독후감도 내가 무엇을 읽었는지 어떤 내용이었는지 그때의 나는 어떻게 느꼈는지를 기억하고 간직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요. 길던 짧던, 표현이 화려하던 평범하던,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스스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행위인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