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기다_천천히, 마지막 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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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사태가 있기 전에는 패키지여행 상품을 판매하는 홈쇼핑 방송을 종종 보곤 했다. 방송은 대개 이런 식이다. 유명 관광지, 파란 하늘과 바다, 고급 리조트, 푸짐하게 쌓아 올린 구이 요리들이 화면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시간이 흐를수록 쇼호스트들의 목소리는 높아간다. 

‘이런 기회는 다시없을 겁니다! 바로 결제하는 거 아니고요, 일단 상담만 신청해두시면 저희 상담원이 전화를 드릴 거예요. 이건 정말 저희 홈쇼핑 사상 유례가 없는 엄청난 특가 패키지거든요. 기존에는 4성급이었던 호텔이 전 일정 5성급으로 업그레이드된, 정말 특별한 구성이니까요! 얼른 휴가를 내셔서라도 신청하셔야 하는 거거든요!’  

청산유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쇼호스트의 말을 지원 사격하듯, 화면에서는 이국의 성을 배경으로 한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진다. 어느덧 남편과 나는 무아지경이 되어 TV 속으로 빨려든다. 

 “직항이고 5성 호텔인데 저 정도면 진짜 싸다. 그렇지?”

 “우리도 할부로 긁고 가버릴까?”

마른하늘에 감이라도 떨어지길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우리 부부는 입을 헤 벌리고 TV를 주시한다. 자주 있는 일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는 홈쇼핑에서 판매하는 여행상품을 구매해 본 적이 없다. 매번 한 가지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니 근데 저것 봐. 동유럽이랑 발칸 6개국을 가는데 6박 9일이잖아.”

 “맞네. 이동 시간 빼면 거의 하루에 한 나라 꼴이네.”

 “그러니까. 저 정도면 관광지에서 사진만 찍고 바로 이동하는 거지, 뭐.”

우리는 위와 같은 이유로 패키지여행을 꺼린다. 특별할 것 없는 한식 식사가 여봐란듯이 포함된 것도, 특산물을 파는 쇼핑센터에 관광객을 우르르 쏟아 넣는 것도 싫지만, 개중에서도 가장 싫은 것은 바로 ‘여유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빡빡한 일정’이다.

 

원하는 곳에, 원하는 시간만큼  

사람들은 각자 특정한 여행 방식을 선호한다. 편리하고 안전한 여행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패키지여행을 즐길 것이다.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곳을 둘러보고 싶은 사람이나 연로한 부모님을 모시고 효도 여행을 가는 사람에게도 패키지여행은 큰 장점을 제공한다. 반면, 조금 불편하고 변수가 있더라도 자유여행을 선호하는 사람이 있다. 불필요하게 끼워 맞춰진 일정 대신 자신만의 시간표로 움직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품을 들여서라도 매번 자유여행을 떠난다. 나의 경우는 당연히 후자다. 나는 원하는 곳에, 원하는 시간만큼 머물 수 있는 여행을 선호한다. 유명 관광지가 아닐지라도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한다면 오래도록 그곳에 멈춰있기를 좋아한다. 이런 성향은 여행 경험들이 쌓여갈수록 더 굳건해지고 있다.

경험상, 특별한 순간들은 서두르지 않을 때 그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단체 관광객들은 좀처럼 찾지 않는 작은 성당과 공동묘지를 거닐 때, 탑 위에서 보는 아름다운 일몰에 홀려 몇 시간 동안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가 그랬다. 공기 중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교회 종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 골목마다 누워있는 살찐 고양이와 큰 개들… 여행이 끝나고 내 기억 속에 남아 빛을 내는 장면들은 언제나 이런 풍경들이었다. 나만의 리듬으로 곰곰이, 천천히 주변을 응시할 때면 늘 이런 선물 같은 순간들이 주어지곤 했다.  

 

여행, 독서, 그리고 인생

여행이 ‘어딘가에 도달하려고 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관점을 나는 좋아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미국의 아동문학가 진 웹스터는 다음과 같이 썼다. 

목적지에 빨리 도달하려고 달리는 동안 주변에 있는 아름다운 경치는 모두 놓쳐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경주가 끝날 때쯤엔 자기가 너무 늙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 <키다리 아저씨> 중

‘여행’이나 ‘인생’ 같은 키워드를 떠올리게 하는 이 대사를, 작가 김영민은 ‘텍스트를 읽는 행위’와 더불어 놓는다. 그는 ‘서둘러 고전의 메시지라는 목적지에 도달하려고 들지 말고, 그 목적지에 이르는 콘텍스트의 경관을 꼼꼼히 감상해야 한다’고 이른다. 그의 말은 ‘고전 텍스트 독해’에서 ‘책을 읽는다는 행위’ 전반으로 확장해볼 수 있다. 독서를 할 때, 끝을 향해 빠르게 달려들려 하지 말고,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의 경관을 꼼꼼히 감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서’와 ‘여행’은 매우 닮은 행위이다(거창하게 덧붙이자면 ‘인생’도 그렇다). 시간과 장소를 넘어 낯선 세계를 경험하고, 무수히 많은 타인을 만나고, 그 과정에 새로운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서로를 꼭 빼닮은 이 행위들은 그렇기에 같은 독법으로 소화해볼 수 있다. 목적지에 도달하기 급급한 여행을 지양하듯 서둘러 마지막 장에 도달하려는 독서를 지양하는 것. 자유로운 여행을 즐기다 종종 길을 잃듯, 책을 읽다가도 자유로운 오독의 순간을 경험하는 것. 느린 걸음을 걸으며 풍경들을 곰곰이 바라보듯 책장 사이사이를 천천히 감상하며 건너는 것. 그래서 텍스트 곳곳에 담겨있는 언어와 사유, 감정과 물음, 역사와 흐름을 헤아려보는 것. 나는 이러한 행위들이 내 안에서 더 오랜 시간, 더 영롱한 빛을 내줄 것이라 믿는다. 내가 패키지여행보다는 자유여행을, 속독보다는 정독을 선호하는 이유다. 

요즘에는 시국이 시국인지라 여행상품을 판매하는 홈쇼핑 채널은 없어 보인다. 나는 TV를 끄고 침대 위에 반쯤 누워 책 한 권을 펼친다. 그리고는 천천히 마지막 장을 향해 다가간다. 특별한 순간들이 살그머니 찾아와주길 바라면서.

1 COMMENT

  1. 저도 자유여행을 선호해요 눈치 안보고 내가 원하는 만큼 둘러보고 먹고 즐길 수 있기 때문에요 🙂 그런데 독서는 속독하려고 애쓰는 듯한 모습이 있어요 아무래도 읽고 싶은 책은 많은데 읽은 시간은 부족하다 보니 더 그런것 같아요 🙁 하지만 점차 다 읽는 것보다 읽는 동안 내가 느끼는 감정과 그 과정에 더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요 🙂 정독을 습관화할 수 있도록 꾸준히 독서하며 스스로 노력해야 할 것 같아요 🙂